진흙 속이지만…연꽃처럼 '나'로 살겠다

입력 2024-03-28 17:23   수정 2024-03-29 02:31


내 자식, 내 가족, 내 나라가 잘되기를. 다음 생은 이번 생보다 행복하기를. 언젠가는 극락왕생할 수 있기를.

이름 없는 한·중·일 여성들의 이 같은 강렬한 염원이 가득 담긴 걸작들이 지금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 나와 있다. 동아시아 여성들의 삶을 불교미술을 통해 조망한 기획전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 열리고 있다. 전통적으로 한·중·일에서 여성은 불교미술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이승혜 리움미술관 큐레이터는 “불교미술 작품들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과거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훌륭한 창”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시아 불교미술을 통해 여성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전시 콘셉트는 처음이다.


신선한 주제만큼이나 주목할 만한 건 ‘블록버스터급’ 규모와 출품작 수준이다. 하나하나가 각국이 소장한 주요 문화재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불교중앙박물관 등 국내에서 9곳의 국보 1건과 보물 10건 등 40건,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독일 쾰른동아시아미술관 등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서는 유물 52건을 빌려왔다. 92건 중 절반 이상인 47건은 한국에서 처음 전시되는 작품. 올해 열리는 고미술 전시 중 단연 압도적이다.
95년 만에 만나는 ‘백제의 미소’
전시작들의 시대는 백제시대인 7세기 무렵부터 대한제국이 있었던 20세기 초까지를 아우른다. 작품이 제작된 곳도 고려 등 한반도는 물론 원나라와 청나라, 일본 등으로 다양하다. 이 중 가장 시선을 끄는 건 7세기 백제에서 만든 26.7㎝짜리 불상 ‘금동관음보살입상’이다. 1907년 충남 부여에서 한 농부가 발견한 이 불상은 1922년 일본인 수집가에게 팔려 1929년 전시를 마지막으로 한반도에서 모습을 감췄다.


2018년 일본의 개인소장자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문화재청은 42억원을 지불하고 불상을 환수하려 했다. 하지만 소유자가 150억원을 제시해 협상이 결렬됐다. 한국 관객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나마 이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됐다. 입꼬리를 올린 ‘백제의 미소’, 흘러내린 옷 주름과 목걸이의 꽃무늬 장식 등 섬세한 세부 묘사, 날렵한 허리와 살짝 비튼 골반의 우아한 곡선미는 이 작품이 왜 백제 미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한다.

일본 혼가쿠지가 소장 중인 15세기 조선 불화 ‘석가 탄생도’와 쾰른동아시아미술관 소장 ‘석가 출가도’의 만남도 주목할 만하다. 원래 한 작품이었던 이 그림은 세월이 흐르면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찢어졌고, 한반도를 떠나 흩어졌다. 기구한 운명을 겪은 두 작품이 고국에서 재회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안타깝게도 석가 탄생도는 5월 5일까지 전시된 후 일본으로 돌아간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빌려온 ‘수월관음보살도’도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이후 6년 만에 한국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수월관음도는 불화의 한 종류로, 관세음보살의 모습이 물에 비친 달처럼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작품은 비단 바탕에 금과 천연 안료로 그렸다. 고려불화의 특성상 보존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 무늬가 보일 듯 말 듯 투명하게 표현된 베일 등 섬세한 표현에 감탄하게 된다.
진흙 속 연꽃처럼
여성도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불교가 탄생할 때만 해도 그 대답은 ‘아니요’였다. 석가모니가 살았던 고대 인도가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였기 때문이다. 전시 1부에서는 ‘여성의 몸은 깨끗하지 않다’는 인식이 담긴 일본의 회화 ‘구상시회권’ 등을 만날 수 있다.


세월이 흐르고 불교가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여성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이 생겨났지만, 남존여비 사상은 여전했다. ‘감지금니 묘법연화경’의 제작을 의뢰한 고려 여인 김씨가 남긴 글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저는 이전 겁의 불행으로 여자의 몸을 받았으니…(중략) 참으로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이로 인하여 은 글자로 쓴 화엄경 1부와 금 글자로 쓴 법화경 1부를 만드는 정성스런 소원을 간절히 내어, 이제 일을 끝마치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와 종교가 요구하는 틀 속에서도 여성들은 끈질기게 공덕을 쌓아 주변 사람들의 안녕을 빌었고, 더 높은 존재가 되고자 했다. 문정왕후(1501~1565)가 발원한 ‘영산회도’와 ‘석가 여래삼존도’, ‘약사여래삼존도’ 등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을 내세운 조선에서 여성들의 후원이 불교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남성으로 여겨졌던 관음보살이 여성으로 인식되는 과정을 담은 관음보살 조각품 여럿, 부정하다고 여겨진 여성의 머리카락으로 부처를 표현한 일본의 중요문화재 ‘자수 아미타여래삼존내영도’도 인상적이다. 이 큐레이터는 “여성은 부처가 될 수 없는 몸이라는 인식을 부정하기 위해 일부러 머리카락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라는 전시 제목은 이렇게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살고자 했던 여성들의 흔적과 내면을 조명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정원과 함께 ‘금상첨화’

불교미술에 관심 없는 관람객이라도 시간을 내 보러 갈 만한 수준 높은 전시다. 그런 점에서 호암미술관의 약점으로 꼽혀온 교통 문제가 해결된 건 미술 애호가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미술관은 전시 기간 중 매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두 차례씩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 사이를 운행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현장 탑승도 가능하지만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는 게 좋다. 주차 공간도 추가로 500여 대 규모를 늘렸다.

전시장 조명이 어둡다. 고려불화 등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작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지만, 어두운 공간에서 보는 불교미술 특유의 금빛 광채가 신비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호암미술관이 자랑하는 미술관 부속 전통 정원 ‘희원(熙園)’에 피기 시작한 꽃과 함께 즐기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다.전시는 6월 16일까지.

용인=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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